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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州 趙 博士의 日常

方寸已亂

by 原州聲援 趙 博士 2025. 5. 3.

건설38년 原州聲援 趙 博士의 노하우knowhow

방촌이란 方寸已亂

모 방. 마디 촌. 이미 이. 어지러울 란.

​마음이 이미 혼란스러워졌다.

마음이 흔들린 상태에서는 어떠한 일도 계속할 수 없음을 비유.

​삼국시대三國時代 때, 유비劉備를 보좌하던 서서徐庶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종의 병서를 독파하여

진영을 구축하는 일에서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유비와 적대 관계에 있던 조조曹操는 서서의 이와 같은 재능이 탐이 나서.

서서의 재능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도록 할 수만 있다면

크게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자기 사람이 되어 줄 것을 요청했지만,

유비에게 충성하던 서서는 단호히 거절하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조조의 모사 정욱程昱은 꾀를 하나 냈다.

​서서가 지극한 효자라는 점을 이용하여 조조는 먼저 서서의 어머니를 속여

위나라로 데려온 후에

서서에게 투항하도록 종용하는 편지를 쓰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서서의 어머니 역시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지 않는 여장부였으므로

조조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정욱은 서서 어머니의 필적을 흉내 내어 서서에게 편지를 보냈다.

마침 군사 문제를 계획하던 서서는 이 편지를 받고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래서 유비에게 가서 말했다.

나라를 부흥시키고 반란군을 토벌하는 일을 돕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조조가 저의 어머니를 포로로 잡고 있어 제 마음이 혼란스러워져方寸亂矣

주군을 위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징비록 을 저술한 까닭
징비록 은 류성룡이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해 있을 때 집필한 책이다.

제목의 징비懲毖 는 중국의 고전인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

나오는 문장인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 

나는 미리 징계해 후환을 조심한다 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류성룡은 스스로 쓴 서문에서 전란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반성에서

징비록 을 저술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류성룡은 좌의정과 병조판서에 이어 영의정 등

최고의 직책을 맡았다.

전쟁 상황을 총괄하는 직책을 맡은 책임자가 쓴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는 더욱 커진다.

전쟁의 구체적인 전개 상황을 비롯해 명나라 군대의 참전 과정과

강화 회담의 뒷이야기, 백성들의 참상 등을 정확하게 포착하고

이순신·신립·원균·곽재우 등 주요 인물들의 공적과 인물평까지 포함하고 있다.

미시적이면서 거시적인 관점에서 임진왜란의 상황을 세밀히 기록한 것이다. 
생생하게 표현된 임진왜란의 상황들
징비록 에서 류성룡은 전쟁의 경과뿐만 아니라 전란 발생의 원인과

조정의 대응에서 드러난 문제점 등을 기록하고 있다.

류성룡은 조선이 초기 전투에서 패배한 중요한 원인을 진관鎭管

체제를 버리고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를 고수한 것에서 찾고 있다.

1555년 을묘왜변 이후에 군의 편제를 고쳐 제승방략 체제로 바꿈으로써,

임진왜란 때 군사들이 모여 지휘관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적의 공격에 효율적으로 대비하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탄금대 전투의 패장 신립에 대한 비판은 신랄했다.

류성룡은 원래 신립은 날쌔고 용감한 것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전투의 계책에는 부족한 인물이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나라를 적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후손들에게 경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해 상세히 적어둔다 면서

탄금대 전투 패전이 작전의 실패였음을 제기했다.

선조의 피란 행렬을 보는 백성들의 불편한 시선과 함께 평양성 사수를

선조에게 강력하게 건의하는 모습도 기록돼 있다.

류성룡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해놓고 또 골짜기까지 들어간다면

한양을 수복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면서 목이 메었고 눈물까지 흘렸다.

그러나 6 11일 선조는 정철 등과 영변을 향해 길을 떠났고,

류성룡은 이원익 등과 함께 평양에 머물면서 최후까지 평양성 사수를 다짐했다.
징비록 에는 이순신의 활약상이 다수 기록돼 있다.

이순신을 발탁한 부분에 대해서는 이순신은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일찍이 조산 만호로 있었는데,

그 무렵 북쪽 변방에 사변이 많았다.

이순신이 배반한 오랑캐 우을기내를 꾀로 유인해 잡아 묶어서

병영으로 보내 베어 죽이니 이후로는 근심이 없어졌다 고 하여

이순신이 여진족의 침입 격퇴에도 큰 공을 세운 장군임을 언급했다.

1592 7월의 한산도 대첩에서는 이순신이 이 한 번의 싸움으로

드디어 적군의 한쪽 세력을 꺾었기 때문에

평행장平行長·소서행장小西行長으로도 알려짐 이 비록 평양을 점령했으나

형세가 외로워져서 감히 나아가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라도·충청도·황해도·평안도 연해 지역 일대를

보전함으로써 군량을 보급하게 하고

조정의 호령이 전달되도록 해 나라의 중흥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하여

한산도 해전의 승리가 전세 역전의 계기가 됐음을 강조했다.

부하들과 소통했던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내용도 나온다.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으로 그 안에 거처하면서 여러 장수와 전쟁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했는데,

비록 지위가 낮은 군졸일지라도 전쟁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은 찾아와서 말하게 했다 며 부하들과의 소통을 중시한 이순신의 모습을 기록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운명이었을까?

이순신이 전사한 1598 11 19일 류성룡은 탄핵을 받고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영의정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안동 하회로 돌아온 류성룡은

이곳에서 전쟁의 경험을 공유하고, 잘못된 부분을 반성하기 위한 기록의 집필에 들어갔다.

징비록 은 그렇게 탄생했다.

징비록 에는 임진왜란 당시 국가와 백성을 위해 분투했던

그의 헌신과 함께 국난 시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세와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무쪼록 우리 장병들이 징비록을 읽으면서 위기에 어떻게 대비하고,

유사시 국가수호 임무를 어떻게 완수할 수 있을지 스스로 다짐하는 시간을 갖길 바란다.

제승방략은 유사시 지방의 병력이 미리 지정된 지역으로 집결한 다음,

중앙에서 파견된 지휘관에게 지휘를 받도록 하는 제도다.

이는 지휘관이 적군보다 늦게 도착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싸우기도 전에 붕괴할 우려가 크다.

이에 반해 진관제는 현지의 지휘관에게 재령을 주는 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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