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夫婦
남편과 아내를 아울러 이르는 말.
잘생긴 남편을 만나면 3년이 행복하고
능력 있는 남편을 만나면 30년이 행복하고
현명한 남편을 만나면 평생이 행복하다
예쁜 아내를 만나면 3년이 행복하고
착한 아내를 만나면 30년이 행복하고
현명한 아내를 만나면 3대가 행복하다
당신은 어떤 남편, 어떤 아내인가
봉산동 鳳山洞
봉산 1동은 봉산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원주천을 경계로.
서쪽의 중앙동, 평원동과 인접해 있고
중앙선 철도가 중심부를 통과하고 있다.
현충로변을 따라 남북으로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태장 1동, 남쪽으로는 봉산 2동과 밀접해 있고
시청에서 3.4km 거리에 있다.
봉산 2동은 시청에서 남동쪽으로 4.5km 떨어져 있으며 소초면과 경계를 이루고
태장 1동, 봉산 1동, 행구동, 반곡동과 인접해 있다.
원주천을 사이에 두고 개운동, 인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봉산동 鳳山洞은 산의 모양이 봉 鳳같다 하여 붙여진 것으로
봉산의 끝봉을 봉산미 鳳山尾라 한다.
일제시대에 봉산 때문에 원주에 인물이 많이 난다 하여
봉산미 부근에 쇠를 박아 혈 穴을 자름으로써 봉산의 정기를 죽였다
하여 봉살뫼 鳳殺뫼 또는 봉살미 鳳殺尾 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봉산동은 원래 원주군 본부면 원주읍 의 지역으로서 일리 一里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화시래의 이름을 따라 화천리 花川里라 하였다.
1938년 원주읍제 실시에 의하여 본부면이 원주읍으로 승격하면서 봉산鳳山의
이름을 따서 봉산정 1,2,3구가 되었다o가 1945년 정을 동으로
고쳐 부르면서 봉산동 1,2,3구가 되었다.
1961년 연합동제 설치에 따라 봉산 1,2,3구가 봉산동으로 되었고
1970년 인구 증가에 따라 봉산동을 1,2동으로 나누었다.
동의 중앙을 중앙선 철도가 지나는 관계로 지역여건상 낙후되어 있다.
1974년까지는 인구 1만명이 넘는 밀집지역이었으나 점차 감소하다가
1993년 이후 삼광택지개발, 삼익, 동신아파트의 건축으로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
따라서 거주형태도 농촌형의 단독주택에서 도시형으로 변모하고 있다.
개릉골
봉산1동에 있는 골짜기이다. 개량골이라고도 한다.
개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개량골
봉산 1동에 있는 마을로 천사들의 집 동쪽에 위치해 있다.
개륜골이라고도 한다.
새로 만들어진 마을 개량해서 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개구리봉
봉산동 못골에 있는 산봉우리를 말한다.
모양이 개구리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구정 龜亭, 九停
봉산동 당간지주가 있는 마을이다.
70여년 전까지만 해도 냇물이 당간지주가 서있는 밑벼랑으로 물이 돌아나갔고
그 벼랑에 거북이와 같은 넓은 바위가 있어 구정이라 불렀다 한다.
나흘가리들
잣나무골 남쪽에 있는 들을 말한다.
들이 넓어서 가는데 4일이나 걸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너르내
봉산동 삼광에서 영냉이로 건너는 곳에 있는 하천이다.
넓은 시내라 하여 너르내라고 한다.
능골
번재 북동쪽, 육판바위골 옆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조선 후기에 왕릉을 보기 위해 다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커다란 능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능은 존재하지 않는다.
동부시장 東部市場
봉산동에 있었던 시장이다.
원주시의 동쪽, 현재의 쌍다리 부근에 있었다고 한다.
원주시의 동쪽에 위치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며느리봉
소초면 흥양리와의 경계에 있는 봉우리를 말한다.
모래기
못골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모락, 모약동이라고도 한다.
모래기는 '몰'에 접미사 아기 가 붙어 몰 아기 몰아기 모라기 모래기가 되었다.
산모퉁이'의 뜻이다.
모래기천
번재와 모래기, 고둔치의 물이 모여 삼익아파트 남쪽에서 화천과 만나는 내를 말한다.
이 합친 물은 다시 봉천으로 들어간다.
모래기에서 이름이 나왔다.
모약동 毛藥洞
모약동은 모래기의 약수터 때문에 후에 락 樂자가 약 藥으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못골
모래기 남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커다란 연못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무진고개 茂辰
봉산동에서 태장 1동 영천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말한다.
효자 황무진이 이 곳에서 태어났으므로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황효자의 효성은 하늘에 닿아 그가 부모님의 약을 지어 밤중에 이 고개를 넘을 때는
호랑이가 나타나 등에 업고 넘거나 호위했다는 전설이 있다.
배말
봉산 1동 파출소 아래, 중앙선 철교 밑의 마을을 말한다.
주촌이라고도 한다.
봉산천이 이 앞으로 흘러서 배가 드나들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지형이 배의 모양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번재 저수지
번재 북쪽, 능골의 서쪽에 있는 저수지를 말한다.
그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으며 농업용수로 사용하고 있다.
봉산 鳳山
원주초등학교 뒤에 있는 산을 말한다.
봉산미, 봉살미라고도 부른다.
봉의 꼬리 부분 같다하여 봉산, 봉산미 鳳山尾라고 하였다.
봉살미 鳳殺尾로 부르기도 하는데
그 유래를 보면 일제시대 일본군사들이 원주에 와서 봉산의 모양을 보고
원주에서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날 것이라 생각하고
봉의 꼬리에 해당되는 곳에 큰 말뚝을 박아 봉의 혈을 자름으로써 봉산의 정기를 죽였다
하여 봉살뫼 鳳殺뫼 혹은 봉살미 鳳殺尾라 불려졌다 한다.
봉산미, 봉살미, 봉살뫼'는 봉산+뫼 봉산뫼에서 파생된 이름이다.
봉산천을 봉천으로 부르는 것으로 보아서 지금의 봉산은 원래 봉 으로 불리다가
봉+산 봉산이 되었고 거기에 다시 '뫼'가 결합하여 봉산+뫼 봉산뫼 봉산메
봉산미 봉살미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봉산로
쌍다리에서 국형사에 이르는 6km의 도로를 말한다.
봉산동을 경유하여 행구동을 통과하므로 봉산로라고 하였다.
봉천 鳳川
치악산 남대봉과 백운산에서 시작하여 원주시가지를 남쪽에서 북서쪽으로 흐르는 내로
호저면 주산리에서 섬강에 합류한다.
봉산천, 원주천이라고도 하고 원주시의 동쪽을 흐른다고 해서 동천東川이라고도 부른다.
봉산의 이름을 따서 봉천, 또는 봉산천이라고 부른다.
때로는 영랑천 화천과 합치는 치악교 위쪽까지를 봉천, 봉산천이라고 부르고
그 하류, 즉 봉산동 앞부터는 원주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살대울
화시래 북쪽, 번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시대 태종이 신하에게 명하여 화시래에서 쏜 새가 화살에 맞아
이곳에 와서 떨어졌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살대'는 화살대를 의미하고 '울'은 물이 세차게 흐르는 여울을 의미한다.
삼광 三光
치악교에서 치악산쪽으로 건너에 있다.
세광댁, 세광마을이라고도 한다.
신선골
원주터널 북쪽, 신선암이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산동에 있는 골짜기로 약 40여년 전에 신선암이 건축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랫배말
봉산동에 있던 마을을 말한다.
배말 아래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용내미
모래기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옛날에 용이 났기에 용내미라고 한다.
입춘단
삼광부락과 영랑촌 사이에 있었다는 제단을 말한다.
삼광부락과 영랑촌 사이에 있었는데 5칸의 기와집이며 사방에 흙돌담을 치고
동쪽으로 문을 냈다고 한다.
매년 입춘날에 흙으로 소를 만들어 단에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며,
지방 수령이 제주가 되어 무병과 풍년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언제 시작되고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작은쇠파니골
모래기 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소초면 흥양에서 남쪽으로 난 큰 쇠파니골과 비교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천왕벌
봉산동 당간지주 앞에 있던 들을 말한다.
신라시대 절 천왕사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학봉정 鶴鳳亭
봉산1동사무소 서북쪽 봉산에 있는 정자를 말한다.
원래 학봉정은 지금 위치보다 200m쯤 올라간 위치에 있었으며
3간 겹집의 2층 누각이었다고 한다.
지금 건물은 6.25 때 파손된 것을 현 위치에 콘크리트 건물로 새로 지은 것이다.
이 정자는 孫昌寬 1863∼1951이 일제의 민족정기말살에 항거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6 . 25사변 때에 없어진 것을 1991년에 다시 중창한 것이다.
정자는 樓로 되어 있어 아래층과 윗층으로 되어 있고
전면 3간, 측면 2간이며 전면 중앙에 鶴鳳亭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현 건물은 한 때 원주궁도협회에서 도장으로 사용하다가
1983년에 명륜동 종합운동장에 또 다른 학봉정을 지었다.
화시래
봉산동 살대울 남쪽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궁위전, 화천, 화실천, 화천리, 실대라고도 한다.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이 그의 스승 운곡선생을 찾아 왔다가 만나지 못하여 쓸쓸히
돌아가던 길에 태종이 이곳에 이르렀다.
서쪽을 향해 날아가는 기러기. 소리개 를 보고 태종 임금이 호반 무관에게 쏘아
떨어뜨리면 새가 돌고 있는 지역을 주겠노라고 하였다 한다.
호위하던 호반이 활을 쏘아 새를 땅에 떨어뜨렸는데
태종이 기뻐하며 새가 떨어진 부근 일대를 호반에게 하사하였다.
그 후 이곳 사람들은 활이 떨어진 자리라 하여 궁실 弓失이라 하였으며
이곳을 흐르는 하천을 궁실천 弓失川으로 부르다가 음역하여 화실천,
또는 화시래로 불리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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