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도단言語道斷
言 말씀 언, 語 말씀 어, 道 길 도, 斷 끊을 단,
말과 길이 끊어졌다는 뜻으로,
말문이 막히는 것,
도저히 말로 나타낼 수 없을 정도로 기가 막힌 상황이라는 의미.
원래 불교 용어로 궁극의 진리는 심오하고 오묘하여 말이나 문자로 표현할 수 없다는 말.
심오하고 미묘하여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는 뜻.
원주原州의 지명이
上古時代 상고시대 원시 부족국가시대로부터 삼국이 정립되기 전에 해당하는 시대에
어떠한가를 알려주는 문헌이 존재하지 않아 당시의 地名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한국사에 있어서 현존하는 最古의 역사서인 高麗 仁宗 23년1145에
金富軾 등이 편찬한 三國史記를 미흡하지만 살펴볼 수밖에 없다.
그럼 같이 삼국사기로 출발
三國史記 卷十八, 高句麗本紀 六, 故國原王 三十九秋九月 王以兵二萬南伐百濟戰於雉壤 敗積
이게 무슨 말인지 아는 현대인은 많지않다.
삼국시대 백제의 세력이 크게 성장하던 4세기에 이르러 원주는
백제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위 기록을 보면 369년 고구려 고국원왕 39년 가을 9월에 왕이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남으로 백제를 정벌하여 雉壤에서 싸웠으나 패배를 거듭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記事는 백제 近肖古王代에도 나타난다
三國史記 卷二十四, 百濟本紀 一, 近肖古王 二十四年秋九月
高句麗往斯由帥步騎二萬 來屯雉壤 分兵侵奪民戶 王遣太子
以兵俓至雉壤 急擊破之 獲五千餘級其分賜擄獲將士
백제 근초고왕 24년 가을 9월에 고구려 고국원왕 사유가 보병과 기마병 2만 명을
거느리고 雉壤에 처들어와 군사를 나누어 백성들의 집을 침탈하므로
근초고왕은 태자를 파견하니 태자는 군사를 거느리고 雉壤에 이르러
급히 이를 격파하여 고구려 군사 5천여 명을 참획하고 그 전리품을
백제 將士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때의 雉壤은 백제영토였으나 고구려 남하세력과 충돌이 일어난 지역으로 보여진다.
아울러 이곳은 백제가 한강을 따라 마련한 동편의 군사 거점지이기도 하다.
이로써 치양은 4세기 중엽에 고구려, 백제 양국의 군사상 요충지였음을 알 수 있다.
三國史記 卷二十六, 百濟本紀 四,
東城王十七年夏五月甲戌朔 日有食之 秋八月 高句麗來圍雉壤城
王遣使新羅請救 羅王將軍德智帥兵救之 麗兵退歸」
백제 동성왕 17년495 여름 5월 갑술 초하루에 해가 일식이 있었다.
가을 팔월 고구려가 雉壤城을 침입하여 포위 공격하므로 동성왕은 사신을 신라에 파견하여
구원을 청하자 신라 炤知王은 장군 德知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구원하니 고구려 군사는 곧 물러나 고구려로 돌아갔다.
같은 기사가 소지왕대에도 수록되어 있다.
위 기록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雉壤은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지형으로 보아
차령산맥의 험준한 산악을 거점으로 하여 고구려가 남진함에
필요한 군사적 전략기지라 보여진다.
雉壤 에서 雉 野」이고, 野는 벌판이니 평야이다.
壤 땅 이며, 大 地이고, 또한 곳이니, 場所이다.
따라서 雉壤 平野地帶가 된다.
고구려 長壽王 57년 469에 평정을 뜻하는 平자와 들 또는 평야를 의미하는
原을 합하여 平原郡을 설치하였다.
평원도 고구려가 평정한 평야지대를 의미 한다.
한강유역 쟁탈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머쥔 신라가 넓어진 국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고자 五小京제도를 시행하며 文武王 18년 678에 中原京忠州 에 이어
두 번째로 원주에 北原小京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12세기 中葉인 고려 仁宗때 이곳을 原州라 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따라서 원주지역의 지명은 雉壤城, 平原郡, 北原小京, 原州牧으로
개칭되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 平原郡 이었다가 신라 문무왕 文武王,재위 661∼681때
북원소경을 설치하였다.
고려 태조에 명칭을 원주 原州로 고치고 지주사知州事가 되었다.
고종 高宗 46년 1259에 고을 사람들이 반역을 하여 명칭을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하였다가
원종元宗원년 1260에 지주사로 회복되었다.
원종 元宗 10년1269에 임유무의 외가라 하여 정원도호부로 승격되었고
충렬왕 忠烈王17년 1291에 합단병을 방어한 공로가 있어 익흥도호부로 고쳤다.
충렬왕 34년 1308에 목 牧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忠宣王 2년 1353에 치악산에 공민왕의 태 胎를 안치하여 원주목으로 회복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원주목으로 하였다.
세조世祖 때 진관 鎭管을 설치하였는데
부 府,도호부는 한 곳으로 춘천 春川,군 郡은 세 곳으로 정선,영월,평창,
현 縣은 세 곳으로 인제, 횡성, 홍천이다.
속현 屬縣은 주천현酒泉縣으로 또 다른 이름은 학성鶴城이라고도 하며
원주군에서 동쪽으로 90리 거리에 있다.
주천현은 본래 고구려의 주연현으로 신라 때 주천酒泉으로 고치고
내성군奈城郡의 영현 領縣이 되었다.
고려 현종顯宗 9년1018에 원주原州에 소속되었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하다가
고종 高宗 43년1906에 좌변면左邊面,우변면 右邊面,수주면水周面세 면을 영월군으로 이속하였다.
원주목은 숙종肅宗 9년1683에 고을 사람이 남편을 시해한 일이 있어 원성현原城縣으로
강등되었다가 숙종 18년1692에 다시 원주목으로 승격되었다.
토포영討捕營을 가설하엿다가 얼마 되지 않아 혁파되었다.
영조 英祖 4년1728에 역적이 태새한 고을이라고 하여 다시 원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영조 13년1737에 다시 원주목으로 승격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영문營門에 권속을 데려가게 하여 판관으로 강등되었고 관찰사가 목사를 겸임하였다.
고종高宗 32년1895에 감영이 춘천으로 옮겨져 원주군으로 고쳐졌다.
순종純宗4년 1910에 강천면을 분할하여 경기도 여주군으로 이속하였고
서원면을 분할하여 횡성군으로 이속하였다.
병합된 이후에도 그대로 원주군으로 하였고 이후에 원주면은 원주읍이 되었다.
원주군의 예전 명칭은 평원 平原,북원경北原京,일신 日新,정원 靖原,익흥益興,
성안 成安,평량경 平凉京,원성 原城이다.
동쪽은 영월군과 평창군. 서쪽은 경기도 양평군 여주시. 남쪽은 충청북도 충주시 제천시.
북쪽은 횡성군과 접하고 있다.
동경 127°45'∼128°13', 북위 37°08∼37°30'에 위치한다.
면적은 867.36㎢ 이고. 인구는 40만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8개면 16개동 178개리가있다.
명륜동 明倫洞 개운동 開運洞 단구동 丹邱洞 봉산동 鳳山洞 무실동 茂實洞
일산동 一山洞 학성동 鶴城洞 태장동 台庄洞 단계동 丹溪洞 우산동 牛山洞
중평동 中平洞 행구동 杏邱洞 반곡동 盤谷洞 원인동 園仁洞 관설동 觀雪洞 가현동 加峴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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