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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州 趙 博士의 휴게소

상지大學대

by 原州聲援 趙 博士 2022. 12. 1.

여그는  원주  우산동에  위치한  상지대학大學교입니다.

우산동은  원주시청에서 동북방향으로 5.5㎞ 떨어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단계동, 동쪽으로는  태장2,

북쪽으로는 호저면 주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도심지 내 우산산업단지가 위치하고 있고.

우산산업단지 안에는 삼양식품, 농협사료, 오뚜기 등의 회사들이 있다.

이곳에  오시는  벗님들  잠시  상지 大學대학을  감상  하시겠습니다.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네  삶에  마음의  쉼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려의 제11대 국왕 문종文宗, 시호는 인효대왕仁孝大王. 휘는 휘, 자는 촉유燭幽.

아버지 현종과 형들인 덕종과 정종의 뒤를 이어

고려의 최전성기 를 이끌었다.

문종 치세 37년 동안 고려는 사회, 경제, 외교, 문화등 모든 부분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여진, 탐라, 일본계 호족들을 아우르던

해동천하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문종도 재위 기간에 문벌귀족들의 힘이 막강해져서 문벌귀족 사회의

폐해를 초래했다는 실책 또한 제기되지만,

문종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건 결과론적인 단편적 해석이고, 보다

장기적인 고려사 전체의 역사 구조적 문제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묘호. 시호. 별호.

태자 순종이 올린 공식 묘호는 문종文宗. 고려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군주였으니

묘향산 보현사 비문엔 성조聖祖라고 기록되어 있다.

16대 예종이 명의태후에게 시책문엔 문조文祖라고 표현했다.

시호는 두 개가 전해지고 별호도 많다.

고려사 문종 세가 총서  장성인효대왕章聖仁孝大王

고려사 문종 세가 마지막 조 명대강정인효대왕明戴剛正仁孝大王

의천 묘지명

문종 인효성왕文宗 仁孝聖王

의천 묘지명이 위 약칭에 미칭을 붙여 문종 인효성왕文宗 仁孝聖王이라 높혀 불렀다.

묘향산 보현사비

성조 문왕聖祖 文王

17대 인종 대에 지어진 보현사비엔 묘호를 높혀 부르고,

원 묘호를 시호로 하여 성조 문왕聖祖 文王으로 불렀다.

별호

문종이 재위하던 중에 제작된 이자연 묘지명엔 문종을 성황聖皇이라 부르고 있다.

역시 문종 재위 중에 만들어진 부석사 원융국사비에선 문종을 황상皇上,

태평천자泰平天子라고 불렀다.

이정 묘지명에선  오황吾皇, 제로 등장한다.

더불어 태자 순종은 저황儲皇, 황족들은 친왕親王으로 등장한다.

현종顯宗·덕종德宗·정종靖宗·문종文宗께서는

부모가 자식에게, 혹은 형이 동생에게 왕위를 잇게 함으로써

 80년 동안 국가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또한 문종은 근면과 검약을 실천하고 현명한 인재를 등용했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가능한 한 관대한 형벌을 부과했고,

학문을 숭상하며 노인을 공경했다.

자격없는 자에게 관직名器을 맡기지 않았으며,

자신과 친한 사람이라고近昵 실권을 주지 않았다.

아무리 가까운 인친일지라도 공로가 없으면 상을 주지 않았고,

측근의 아끼는 신하라도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내렸다.

환관과 급사의 수가 10여 명에 불과하고 내시內侍는 반드시 공로와

재능이 있는 자를 가려 임명했는데

이 또한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쓸모없는 관리가 줄어 일이 간편해졌으며,

비용이 절약되어 나라가 부유해졌다.

나라의 창고에는 해마다 곡식이 계속 쌓이고 모든 백성들이

풍요를 누리니, 당시 사람들이 태평성대라고 찬양했다.

문종의 재위 기간 동안 고려는 나라가 부유해지고, 불교와 유학의 조화가 이루어졌으며

외교적으로도 북송, 요나라, 일본과의 사이에서 중심추를 잘 잡아

외침이 없었으니, 이 시기 문화적으로 다양한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문종의 4남인 대각국사 의천은 북송에 밀항 유학 뒤 천태종을 도입해

고려 불교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끌었고, 해동공자 최충도 이 시기의

인물로 유학 또한 흥성하게 된다.
보통 명군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상당수는 재위 기간이 길수록 후반부에

혼란이 일기 쉬운데 문종은 재위 후반부로 접어들어도 정치적인 문제가

발생했다는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데다 나라에 일이 생긴 것은 여진족

침입을 막아냈다 정도 뿐이었다.

재위 기간도 37년으로 고려에서는 제23대 고종46년 다음으로

긴 재위 기간을 자랑한다.
이처럼 한국사에 손꼽힐만한 태평성대를 이룩했음에도 불구하고

문종의 인지도는 업적에 비해 낮은 축에 속한다.

사극에라도 나오면 대중적 인지도가 올라가지만 이 시기는 작가들도 잘

몰라서인지 소재가 없어서인지 잘 나오지를 않는다.
교과서에서도 고려의 태평성대 기간은 거란의 침공 여요전쟁과

윤관의 여진정벌 동북9성 사이에서 생략되며, 바로 문벌귀족의 폐해를 설명하고,

무신정권으로 넘어가는 등 은근히 소외받는 시기다.

교과서에서도 등장이 없으니 한국사 능력검정시험이나 공무원 시험 등

일반인들이 주로 치는 시험에도 등장이 없다.

시험에서 자주 등장하는 제6대 성종이 훨씬 잘 알려진 편.

굳이 들자면 경정전시과가 언급되기는 하지만 시험에는 제5대 경종의

시정전시과가 주로 출제되는 편이며, 최충의 9재학당설립 당시의 임금 정도로만 나온다.

 

우산동은 원주시청에서 서북쪽으로 6㎞ 떨어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원주시 단계동, 동쪽으로는 태장 2동과

서쪽으로는 호저면 주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우두산 牛頭山의 이름을 따서 우산리 牛山里라 하여

호저면 好楮面에 편입되었다가 1955 9 1

원주시 구역 확장에 의하여 원주시에 편입되어 우산동이 되었다.
원래 원주군 저전동면 楮田洞面의 지역으로서, 이리 二里라 하였는데,

1914년 우산리라 하여 호저면에 편입되었다가 1955

원주가 시로 승격할 때 원성군 호저면 우산리가 시로 편입되면서 우산동을 설치하였다.
예전에 우산동은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고 한다.

진흙밭이었던 우산동은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살고

남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현재는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그런 말도 없어지게 되었다.
외부유입인구와 유동인구가 많고 터미널과 상지대학교가 있어서

식당과 숙박업소 등이 많고 상가와 인구가 밀집되어 있다.
가래울들 
윗골 남쪽에 있는 들을 말한다.
고개가 갈라지는 곳에 있어서 가래울들이라고 한다.
덤바우
현재 상지대 뒤쪽 영동고속도로 건너편 산에 있다.
바위가 병풍처럼 생겼다고 한다.
돌터거리
현재의 우산아파트와 상지대 사거리 사이의 마을을 말한다.

석대라고도 한다.
마을 앞에 큰 반석이 있어서 돌터거리라 했다고 한다.
모세거리보
현재 우산동 동사무소 앞에 있었던 보를 말한다.
모래가 많고 터가 넓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봉바우산
덤부우산 앞에 있는 돌산을 말한다.
봉바우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북원로 北原路
우산철교에서 시계에 이르는 4km의 도로를 말한다.
신라시대 원주의 옛 지명인 북원에서 따왔다.
산골고개
우산동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산골이 나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상봉上峰
현재 진광중고등학교 뒷산을 말한다.
봉우리가 높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새마을
현재 우산아파트와 상지 경로당 사이의 마을을 말한다.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역들
유원 앞에 있던 들을 말한다.
역 앞에 있는 들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옻물
옻오른 사람에게 효험이 있다는 우물이다.
우두산 牛頭山
우산공단 서쪽에 있는 높이 172m의 산을 말한다.
소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우두산 牛頭山이라고 한다.
옛날 어느 농부가 잃어버린 소를 이 산 아래에서 찾았다고 우두산으로 불리워졌다고도 한다.
우두산골
우두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우무개
상지대학교 남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음무현, 음현, 암현, 으무개, 음무개라고도 한다.
원주목사가 서울서 원주로 부임해 올 때는 앞에다 삼현육각을 잡히고 오는데

역말이 있는 우무개서부터 삼현육각을 울렸다고 한다.

삼현육각이란 거문고, 가야금, 비파를 삼현 三鉉이라 하고 북, 장고, 해금,

대평소 한 쌍, 피리를 육각 六角이라 한다.

이 아홉 개의 악기가 합주하는 뒤로 목사가 따라 들어선다.

또 고관대작들을 환송하거나 전송할 때도 역말이 있는 이곳까지 와서 멎곤 했는데

이런 연유로 고개 이름을 음무현 音舞峴으로 부르다가 음현 音峴 또는

음무개, 으무개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중앙선 전철변에 있는 농촌부락이다.
우무개는 땅의 지형이 우묵한 곳에 붙는 지명이다.

호저면 옥산리에도 우무개가 있는데

고개 밑에 우묵하게 들어간 곳에 있으며 이곳도 지형이 상지대가 있는

산 아래로서 우묵한 곳이다.
우산동 로터리 
우산철교 앞 사거리를 말한다.
가운데 화원을 만든 회전식 교차로였으나 지금은 철거되고 신호등 체계로 바뀌었다.
우산들
우두산 앞에 있는 들을 말한다.
우두산 앞에 있는 들이라고 붙여진 이름이다.
유문由門
상지대학교옆 영동고속도로변 산림 및 농경지일대를 말한다.
조선시대 유원역 由原驛이 있어 이곳에서 말을 갈아 탄 곳이라고 한다.
유원 由原
상지대 북서쪽에 있던 마을을 말한다.
조선시대 유원역 由原驛이 있었다고 한다.
은질마배기
장자골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옛날 장자골 어느 부자가 은질마 말안장를 묻었다고 한다.

우두산 앞에 있는 마을이나 현재는 주택이 많이 들어서서 정확한 위치를 찾을 수 없다.
잣나무골
고방터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잣나무가 많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잣나무는 없다.
장자골 長者
우두산 앞에 있는 마을이다.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부자가 살았던 마을이라고 한다.
진골
산골고개 밑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긴 골짜기이다.

철도연변
현재 동우아파트 부근 마을을 말한다.
6.25사변 후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생긴 마을로 중앙선 철도 연변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풀무골
현재 우산초등학교 부근을 말한다.
골짜기가 풀무질하는 모양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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